Chapter 86


22.

쿵쾅, 쿵쾅.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메리골드는 몸을 웅크렸다.

차마 발 뻗을 공간도 없을 정도로 빽빽하게 잠든 사람으로 가득 찬 짐칸이었다. 후텁지근하고 답답한 그곳에서, 메리골드는 고슴도치처럼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악취와 습기, 코골이와 이갈이. 당장이라도 금방이라도 탈출하고 싶을 만큼 끔찍한 곳이었지만, 메리골드는 오히려 이 잠 못 이루는 밤이 꽤 괜찮다고 여겼다.

이런 밤은 그녀의 수많은 삶을 하나하나 되짚어볼 시간이었으니까.

“메리.”

메리골드는 그녀의 수많은 삶 속에서 늘 등장하던 존재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가난했던 때에도, 어렸을 때에도, 죽기 직전에도,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던 밥벌레 시절에도. 란셀 단테는 언제나 나타나 그녀와 함께했다.

집안이 몰락하고 빈털터리가 된 그녀의 삶에서, 란셀은 언제나 과분한 존재였다. 사실 ‘운명’이라고 말하기엔 조금은 민망했다.

그녀에게는 란셀 단테가 필요했지만.

란셀 단테에게는 그녀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메리.”

“메리.”

“메리.”

‘윽!’

메리골드는 금세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았다.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란셀 단테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매번 다른 모습, 다른 목소리로 그녀를 찾아왔던 목소리. 그녀의 마음을 계속해서 약하게 만들었다.

“이, 이번 삶에서 실컷 같이 지냈으니까 됐다. 이제 만족. 휴우.”

메리골드가 다급하게 말을 더듬었다. 넘쳐흐를 듯한 기억으로부터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결혼도 하고, 여행도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해서 이제 더 하고 싶은 것도 없네. 좋다, 좋아. 흐흐. 란셀 님이랑 하고 싶은 거 죄다 해버렸지.”

포를란드에서.

빛나는 숲에서.

사막에서, 화산에서, 꽃밭에서.

메리골드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휴우, 열심히 살아서 다행이야. 조금 더 열심히 살았으면 더 좋았을……아니, 이거면 충분히 열심히 살았어. 이거면 됐어.”

“조용히 해! 잠 좀 자자!”

“죄, 죄송합니다.”

메리골드는 짐칸 어딘가에서 들려온 소리에 급히 목소리를 죽였다.

‘그러니까 란셀 님.’

메리골드는 더욱 깊숙이 몸을 말고 누웠다.

그녀의 눈앞에서 새근새근 잠든 요정, 피나의 머리를 손끝으로 쓰다듬으며.

‘이제부터는 남은 제 모든 인생을 바칠게요.’

메리골드의 입가에 미소가 머물렀다.

‘란셀 님이 그랬던 것처럼.’

.

.

.

“메리. 우리 인생 정말 어질어질하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메리골드가 남긴 수첩을 보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 담겨있는 목록을 란셀은 무심히 눈으로 훑었다.

솔직히 대단한 내용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여행을 다니면 겪을 법한, 아주 소소한 것들일 뿐이었다.

그마저도 반 이상이 실패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딱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아네모네 꽃밭이라던데, 벌써 지면 아쉬워서 어떡해요.’

‘소문대로 엄청나게 넓긴 하더라.’

‘으으, 좀 더 일찍 왔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에 또 오면 되잖아?’

드넓은 꽃밭에서 어딘가 쓸쓸한 표정을 짓던 메리골드의 얼굴이, 자꾸만 그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시간.

회귀자에게는 넘쳐나는 것.

란셀은 회차가 망하든 말든 딱히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막말로 헛짓거리하다 비명횡사해도, 형틀에 묶여 불타 죽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부활하면 그만이야!’

하지만 메리골드는 달랐다.

란셀이 했던 생각과는 달리, 그녀에게는 모든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축제에서도, 온천에서도, 꽃밭에서도.

그녀는 란셀과 함께한 모든 순간의 기억을 마치 마지막 앨범처럼 쌓아갔던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는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것이 란셀 단테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메리. 잡히면 가만 안 둔다.’

란셀의 주먹이 떨렸다. 당장 메리골드의 정수리에 한방 먹이고 싶어서 슬슬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바라지도 않은 짓을, 자기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벌인 이 건방진 신참 회귀자에게 빨리 이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다.

벌써 몇 달 묵힌 꿀밤인지 모르겠다.

“란셀 단테. 이제 와서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해도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이거 충분히 황족모독죄로 치부될 여지가 있어. 고발하면 즉시 화형이니까 인지는 해둬.”

“그거 정말로 ‘이제 와서’군요. 기술적으로 보자면 전하께서는 지금 제게 납치된 겁니다.”

“납치……. 사람의 충성을 얻는 건 매번 어려운 일이니 무슨 일이든 감내하려고 했지만……이런 수모를 겪고 싶지는 않았어, 란셀 단테.”

란셀은 마부석 옆자리에 앉은, 평범한 아낙네 같은 복장의 여자를 흘끔 곁눈질했다.

얼굴을 덮은 베일 너머로, 푸른색의 머리칼이 언뜻 보였다.

“다 인생의 경험이라 생각하십시오. 어차피 이 제국이 안락한 시기도 이제 얼마 안 남았잖습니까. 앞으로 수모를 겪을 날은 오늘 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혹시 재수 없어서 죽을 수도 있고요.”

“후후, 권력자는 죽음보다 단 하루라도 권력 없는 날을 살아가는 게 더 두렵다는 말, 혹시 들어봤나?”

“그거 참 피곤한 사람들이군요. 죽음만 두려워해도 바쁜 삶에서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따로 있다니.”

“피곤해. 맞아. 잘 아는구나. 이게 다 사서 고생하는 인생이지.”

그때였다.

란셀은 끌고 가던 마차를 멈춰 세웠다.

“세워라!”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길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마차를 수색하고 있다. 순순히 협조해.”

란셀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기사들이 다가왔다.

“뭘 실었지?”

“동물 가죽 뭉치입니다만.”

마차 뒤에 실려있던 동물 가죽을 뒤집어까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거기, 여자도 얼굴을 보여라.”

“제 부인입니다.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부인?”

기사들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뜸 외간 여자의 얼굴을 살펴본다는 게 기사도에 반하는 일이기는 했다.

“흠. 잠시 대기하도록.”

그때,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기사단이야. 어떻게 할 거냐, 란셀 단테.”

“…….”

“여기서 내가 소리라도 지르면 어떻게 될까? 그대는 즉시 반역자로 찍힐걸? 감히 제국의 위대한 핏줄을 보쌈해서 끌고 가는 도적놈이라고 말이야.”

란셀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알았다. 그녀가 무슨 선택을 할지.

“꺄아악! 황녀를 납치하는 무뢰배! 기사들이여, 당장 이 자를 죽여라! 나를 구출해라!”

“……?”

“그게, 무슨?”

“방금 뭐라고……?”

기사들은 단체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황녀 살려!”

이 여자의 장난기에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란셀은 속으로 욕지기를 곱씹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상대는 고작 열댓 명의 기사들이었지만 어딘가에 따로 본대가 있을 터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막대한 지원이 도착할 것이고, 그러면 골치가 아파졌다.

스악-!

번뜩이는 칼날이 어리둥절하던 기사들에게 뿌려졌다. 마차에 올라탄 두 명의 기사가 단숨에 떨어져 나갔다.

“끄아악!”

“이, 이 새끼가 칼을 뽑았다!”

란셀은 마차에 채찍질을 가했다. 두 마리의 말이 앞발을 쳐들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앞을 막아서고 있던 기사들이 갑작스럽게 출발하는 말에 치여 튕겨 나갔다.

“크악!”

“도망간다!”

“자, 잡아! 빨리 잡아!”

고함이 멀어져 갔다.

급히 말을 몰아 쫓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옆에서는 자신을 자칭 황녀라고 주장한 여자가 배를 부여잡고 웃고 있었다.

“아하하하!”

콱-!

마차 주변으로 쇠뇌 화살이 날아와 박히는 판국에도 그녀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란셀 단테, 감히 황족에게 칼을 들이밀고 수모를 겪게 하는 무뢰배 자식이지만 꽤 놀리는 맛이 있어서 마음에 든다니까.”

“머리통에 화살 박히기 싫으면 고개나 숙이고 계시지요.”

“어차피 그대가 막아줄 거잖아?”

라고 말하기 무섭게 란셀이 팔을 들어 그녀의 뒤통수를 감쌌다.

단단한 건틀릿이 날아든 쇠뇌 화살을 튕겨냈다.

“멋져!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사 같았어, 란셀 단테.”

“……제정신입니까? 저와 메리골드에게 필요한 분이시니 살려둔 겁니다.”

“호오. 메리골드, 정말 복 받은 여자구나. 나도 어릴 땐 그대 같은 기사와의 로맨스를 꿈꾼 적이 있지.”

“…….”

23.

“……란셀 군이랑 아는 사람이라고?”

수도에 도착한 메리골드가 곧장 찾아간 사람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도 자주 등장했던 이빌 쉔 남작이었다.

“다음 주 황실 무도회에 참가하려는데 돈이 좀 필요해서요. 금화 다섯 닢 정도……일단은 란셀 단테 님 앞에 달아주세요.”

“그러니까, 그, 설마 지금 내게 돈을 빌리러 온 것이오? 이렇게 갑자기? 새벽에?”

“네.”

“……초면인데?”

“네!”

이빌 쉔 남작이 진땀을 뻘뻘 흘렸다.

한밤중에 문을 두드린 여자가 대뜸 란셀 단테의 이름을 거론하며 돈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혹시 맡겨 놓은 건가 싶을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금화, 빌릴게요.”

뻔뻔함도 이쯤 되자 이빌 쉔 남작은 당연히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섯 닢이라고 했나?”

“네!”

“……그런데, 황실 무도회에 참가하는데 그렇게 큰돈이 왜 필요한 것이오?”

“그, 드레스도 사고, 장식도 사고……음……으음……수도까지 온 김에 맛있는 것도 좀 먹고…….”

이빌 쉔 남작은 눈썹을 찌푸렸다.

란셀 단테라는 이름을 대서 돈을 빌리는 것을 보면 평민은 아닐 것이다.

그가 단테 가문에게 마음의 빚이라도 있다는 걸 아는 자가, 평민일 리는 없었으니까.

‘어디 세상 물정 모르는 귀족 영애님인 거 같긴 한데….’

다만 좀 허름한 모습이긴 했다.

거지꼴에 가까울 정도로.

“일단 차용증은 써야겠소.”

“얼마든지요! 제가 나중에 꼭 갚아드릴게요. 10배……아니, 20배로!”

“……내가 이렇게 아무한테나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아닌데…….”

영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이빌 쉔 남작은 그녀에게 금화와 차용증을 내밀었다.

서명란에 담긴 이름은 ‘메리골드 커튼 메리골드.’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의 이름이었다.

“어째 들어본 거 같은 이름이구먼. 혹시 나랑 어디에서 안면이 있었소?”

“아, 아니요, 초면이에요.”

“……그런가?”

“감사했습니다! 돈 꼭 갚을게요!”

메리골드라는 여자는 그렇게 쏜살같이 멀어져 갔다.

“……?”

초면인 사람에게 금화 다섯 닢을 뜯긴 이빌 쉔 남작은 그날 온종일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다시 잠자리에 든 그는 다음 날 저녁.

쿵쿵-!

또다시 저택을 찾아온 누군가에 의해 잠을 깨야만 했다.

“돈 좀 빌리러 왔습니다.”

“……란셀 군?”

이번엔 란셀 단테 당사자가 그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돈 주십쇼. 돈.”

“지금 시간이 새벽…….”

“금화로 다섯 닢. 앞으로 5년 뒤에 열 배로 갚을 테니까 일단 좀 주십쇼. 빨리. 당장.”

“……이, 일단 멀리서 왔는데, 들어와서 차나 한잔 하면서…….”

“제가 좀 바빠서요. 황실 무도회에 참가할 계획이라 지금부터 준비라는 걸 좀 해야 합니다. 맛있는 것도 좀 먹고요.”

“……또?”

“예?”

이빌 쉔 남작은 자기 뺨을 짝짝 두드렸다. ‘꿈인가?’라며 지금 상황을 의심하는 듯했다.

“뭐 하는 겁니까?”

란셀 단테의 표정이 이상해지자 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돈은 빌려주겠네. 단테 가문의 사람인데 믿고 줘야지. 안 갚아줄 것도 아니잖나.”

“…….”

“안 갚아줄 것도 아니잖나.”

“…….”

“안 갚아줄 것도…….”

“빨리 주기나 하세요.”

이빌 쉔 남작은 결국 금화를 건네주었다.

란셀 단테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주머니로 가져갔다. 마치 그에게서 돈을 이미 몇 번이나 빌려본 사람처럼 물 흐르듯이.

“……혹시 내가 돈 잘 빌려주는 사람이라고 어디에 소문이라도 난 건가? 어제도 누가 와서 돈을 빌려 갔어. 그것도 단테 가문 이름을 대면서.”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용도도 자네랑 똑같이 황실 무도회였다니까? 귀신에 홀린 기분이구먼, 이거 참. 내가 이래 보여도 수도에서는 쪼잔하다고 악명이 자자한 사람인데, 어디서 돈 나오는 구멍이라도 난 건지, 원…….”

란셀 단테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혹시 누가 왔다 갔습니까? 왔다 간 사람 이름 말입니다.”

“응? 그……누구더라? 메……메리…….”

그의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란셀 단테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는 차용증조차 쓰지 않고 돈만 받아서 저 멀리 사라져갔다.

“……?”

이빌 쉔 남작은 그날도 싱숭생숭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