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5.
[길드 용병, 란셀]
메리골드의 심장은 길드 본부 건물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뛰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심해졌다.
“와, 아침인데 벌써 땀 냄새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뭉게뭉게하네. 가까이만 가도 오염될 것 같아. 응? 아가씨? 아가씨이이?”
메리골드는 말릴 틈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뭐야? 여기는 용병 길드잖아, 계집은 가… 아아아악!”
막아서는 사람의 손목을 돌려버리며 맨 앞까지 억지로 파고들었다.
“새치기는 나쁜 거라고요, 아가씨.”
“아.”
마침내 맨 앞줄에 도착했을 때. 메리골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란셀 단테…….”
꿈에서 보았던 남자.
그가 접수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쿵쿵, 쿵쿵.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슴이 크게 두근거렸다.
“대체 누군데 저 사람을 계속 신경 쓰는 거예요, 아가씨? 그냥 흔한 귀족이잖아요.”
그 말에 돌려줄 대답이 마땅치 않았다.
이 감정은 호감이냐 비호감이냐, 좋아서냐 싫어서냐 라는 말로 잘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원래 알던 사람도 아니잖아요. 대체 저 사람이 누군데요?”
“음.”
고심 끝에 메리골드는 고개를 갸웃하며 피나에게 대답했다.
“전 남편?”
“……?”
틀린 말은 아니었다.
꿈에서였지만.
“지금부터 시험을 시작한다! 한 명씩 들어오시오!”
이후 시험이 시작되었고, 메리골드의 차례가 다가왔다. 그녀가 칼을 부딪칠 상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한 수 부탁드립니다. 란셀 단테 님.”
* * *
메리골드의 합격 여부는 사실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급 검술을 마스터했다는 것부터가 용병으로 활약할 최소한의 기본 능력치는 확보되었다는 의미였고.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 또한 과거와 다르게 자세가 잡혀있는 것이 보고 있으면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어지간한 용병들보다 솜씨가 좋으리라.
“한 수 부탁합니다. 란셀 단테 님.”
무엇보다 눈빛.
저 타오르는 눈빛.
에메랄드를 깎아 만든 것처럼 영롱한 그녀의 눈동자에서부터, 금방이라도 번갯불이 튀어 오를 것만 같았다.
메리골드는 말을 아꼈지만, 란셀은 그 안에서 요동치는 미증유의 격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회차에서는 초면 아니었나?’
란셀은 잠시 말을 잃었다.
메리골드는 회귀자가 아니다. 이전 회차의 기억 따윈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런데 어째서?
“응해주시죠. 저렇게나 원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3황자가 입을 열었다. 작게 미소를 그리고 있는 입꼬리. 그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음.
무슨 상황이지, 이게.
“뭐 하냐. 그분은 길드 마스터이시지 심사관이 아니야. 얼른 이쪽으로……”
란셀은 손을 들어 심사관의 목소리를 막았다.
아무 말 없이 그의 허리춤에 있던 목검을 뽑아 들었다.
“도련님?”
“됐다. 심사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거지. 가만히 서 있느라 따분했는데 잘됐네.”
“괜찮으시겠습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옙!”
심사관들이 모두 뒤로 물러섰다.
모든 사람이 구경꾼처럼 란셀과 메리골드, 두 사람을 에워쌌다.
예상 밖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장내가 술렁였다.
“여관에서 일하던 계집랑 귀족이 대련하다니. 내 오래 사니까 별 희한한 꼴을 다 보겠구먼.”
“시골에서 온 샌님이랑 여급인가.”
“그래도 기사라며?”
“빼빼 말라서 기사는 무슨. 그냥 나올 구멍을 잘 골라서 받은 계급이지.”
용병들의 입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아무리 용병이 만만해졌어도 그렇지, 여관 계집애가 하겠다고 설치는 건, 나 원 참.”
“뭘 모르는 소리. 저 여자, 보통 여자 아니야. 서쪽 여관에서 저 여자 건들다가 다친 놈들만 열댓 명은 될걸.”
“뭐?”
“저 여자가 그 여자야?”
메리골드를 바라보던 용병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했다.
다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소문이던 모양이었다.
“오늘 여기 못 온 로번 그 자식 알지?”
“허리 삐끗했다고 누워있는 그놈. 잘 알지.”
“저 여자 작품이야.”
“허. 목욕탕에서 자빠졌다더니 구라였냐.”
란셀은 가볍게 목검을 한 바퀴 돌리면서 메리골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렇게 하자. 내 옷에 스칠 수만 있다면 그 즉시 동인장을 주마.”
철인장부터 시작하는 용병들보다 한 단계 위의 계급이었다.
“딱 한 번이라도 내 몸에 닿는다면 은인장, 딱 한 방울이라도 피가 나오게 한다면 금인장. 어때?”
“만약 이긴다면요?”
“이긴다면……”
란셀은 미소를 머금었다. 승부욕으로 달아오른 메리골드의 모습.
“그때는 네가 원하는 걸 뭐든 들어줄게.”
“약속한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시험관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준비, 시작!”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메리골드의 목검이 선을 그었다.
바닥을 미끄러지듯이 순식간에 다섯 걸음을 좁히며 목검을 찔러 들어온 것이다.
란셀은 가볍게 고개를 틀어 피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몸놀림엔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그녀의 목검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이었다.
‘…마력?’
아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마력을 검에 담는 건 ‘최상급 검술’을 마스터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한 일. 메리골드에겐 아직 한참이나 먼 경지였다.
하지만 지금의 메리골드는 목검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 나왔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그녀의 머리칼이 살짝 나부낄 정도였다.
갑자기 성취가 다섯 단계 위로 뛰어올라서?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가능한 경우는 오직 하나.
‘유리. 저 자식.’
란셀은 흘끔 뒤로 시선을 날렸다. 그곳엔 활짝 펼친 부채로 턱을 가린 3황자가 있었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으로 둘의 대련을 감상 중이었다.
가만히 마력의 흐름을 느끼자 확실히 보였다. 3황자의 몸에서부터 흘러나온 마력이, 메리골드에게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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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 이벤트 발생! 3황자가 메리골드를 응원합니다. 5등위의 마법 ‘블레싱’을 시전합니다. 3황자의 마력이 소진될 때까지 메리골드의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3황자는 용병 길드 마스터 ‘란셀 단테’가 곤경에 처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를 꺾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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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싱(Blessing).
고위 마법사 수준의 축복이 메리골드를 극한으로 강화했다. 지금 그녀에게 있는 마력은 사실상 3황자 유리의 능력이었다.
‘하여튼 이 제국의 황자들은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야.’
저런 놈들한테 시집을 가야 할 메리골드가 불쌍하군. 그렇게 생각하며 란셀은 자세를 고쳐잡았다.
“오해하진 마, 메리골드. 너한테 악감정은 없으니까 말이야.”
설렁설렁 하려 했더니.
6.
란셀은 3황자의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다.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 얼마나 강한 힘을 숨기고 있는 건지. 그게 보고 싶은 거다.
란셀은 그 의도에 놀아날 생각 따윈 없었다. 몸 안에 있는 마력을 모두 갈무리했다. 지금부터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오로지 그의 육신뿐이다.
스아아악-!
공기째로 찢어발기는 소리를 내며 메리골드의 목검이 날아왔다.
란셀은 그 힘을 흘려내며 뒤로 물러섰다. 정면으로 부딪치면 박살 내버릴 파괴력이 그 안에 꿈틀거렸다.
둘 사이에서 수많은 공방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눈으로 따라가기에도 어려운 속도였다.
“……저게…….”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점점 경악으로 가득 찼다.
무시무시한 힘으로 달려드는 메리골드의 검격도 물론 대단해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 기이한 건 한 손으로 그 모든 공격을 흘려내는 란셀.
“힘이 충분해도 아직 부족해. 아직 멀었어.”
그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쳤다.
“허리가 비었어.”
“아윽!”
“엄살은. 이번에 어깨가 비었구나.”
“악!”
이따금 메리골드의 텅 빈 자리를 칼끝으로 툭 건드릴 정도였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지 아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그저 란셀 단테가, 그들의 이해를 넘어설 정도로 검술에 통달한 인물이라는 것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흐음.”
상황이 그렇게 되자 한 사람의 표정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란셀은 그의 변화한 감정을 느끼고 쾌재를 질렀다.
‘무식하게 능력치만 올려준다고 다 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황자 전하.’
메리골드의 능력은 3황자가 보내오는 마력을 기반으로 강화된 것이다. 그 말은 즉, 시간이 지날수록 고갈되는 것도 그의 마력인 셈이다.
물론 마법 천재로 불리는 3황자 입장에서야 남아도는 것이 마력이었고, 당장 티 날 정도는 아니었겠지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겠지.
란셀은 그 사실에 만족했다.
스아악-!
메리골드의 눈빛에서 붉은 고리가 나타날 때까지는 그랬다.
“……다시 갈게요.”
그녀의 표정에서 지친 기색이 사라졌다. 흐르던 땀방울이 공기 중으로 증발하며 아지랑이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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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가 갱신됩니다! 3황자는 메리골드가 지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7등위의 마법 ‘오버플로우(Overflow)’를 시전합니다.
※3황자의 마력이 더욱 많이 소모됩니다. 메리골드의 생명력, 정신력이 지속해서 소모됩니다. 컨디션이 대폭 내려갑니다.
※지금부터 메리골드가 입는 ‘모든 피해’는 3황자의 ‘마력’으로 대체됩니다. (남은 마력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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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오래 전 회차에서 란셀은 오버플로우의 효과를 직접 경험한 적이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아주 엿 같았다.
“흐으윽!”
밀려들어오는 힘에 경련하는 메리골드의 모습.
란셀의 눈동자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사실 적당히 싸우다가 져주는 것까지도 생각해봤다. 그것이 황자에게 메리골드가 잘 보일 만한 포인트가 된다면. 미래의 황비가 될 첫걸음이 된다면.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 새끼는 좀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다.
‘3황자, 이건 네가 먼저 선 넘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