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


회화루.

회화루주(繪花樓主)는 산적처럼 험악한 인상을 한 채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래서, 데려오라 명한 여자는 어디에 두고 너희들만 왔더냐?”

덜덜 떨던 왈패 하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예화가 진짜로 여고수를 찾아낸 모양입니다. 영곽이가 저항도 못하고 맞았고, 그 와중에도 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귀신같이 피했습니다.”

회화루주가 말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건 아니고, 그쪽에서 그냥 보내줬습니다.”

“보내주면서 무슨 말이라도 했나?”

“찾아갈 테니 기다리라고는 했습니다.”

회화루주는 주변을 둘려보면서 말했다.

“대체 뭐 하는 여고수라더냐? 쓰는 무기는 또 무엇이고?”

왈패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차마 맨손으로 처맞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물어보면 대답을 해라.”

“맨손으로 맞았습니다.”

주변에 도열해있던 간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회화루주도 코웃음을 치며 왈패들을 쳐다봤다.

“이거 보기보다 더 멍청한 놈들이었군.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돌아온거냐?”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에 확 묻어버릴까요.”

회화루주는 계속 비웃는 대신 자리에서 대뜸 일어나더니 왈패의 뺨을 쳤다. 짝! 소리와 함께 졸지에 뺨을 또 맞은 왈패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어떠냐. 그 여인이 이것보다 아프게 때리더냐?”

“…….”

숨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치가 있다면 여기서 회화루주의 공격이 더 아프다고 해야 했다.

회화루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다시금 왈패의 뺨을 쳤다. 이번에는 약간이지만 내공도 실었다. 짜악- 소리가 방 내에 울려퍼졌다.

“죄송,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사내는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간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루주님. 그 여자는 아무래도 내공을 싣지 않았겠습니까? 분명 힘깨나 썼을 겁니다.”

“원래 많이 맞으면 감각이 둔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멍청한 놈이라 제가 아픈지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이쯤 되니 회화루주도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회화루주는 아예 한쪽 소매를 걷어붙이고 사내의 뺨을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벽까지 튕겨나가자, 회화루주는 그제서야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 멀리 치워라.”

“예, 루주님.”

기절한 왈패를 끌고 사라진 수하들을 지켜보던 회화루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왈패 놈들을 멀쩡히 돌려 보냈으니 흑도일 가능성은 낮았다. 흑도였다면 못해도 손가락이나 귀 정도는 잘라 보냈을 테고, 가끔 심한 놈들은 팔을 잘라 보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손속이 딱 정파인데.’

듣자하니 복장부터가 도인 같다고 했다. 애초에 아미파의 승려라면 면사를 쓸 이유도 없다.

회화루주는 간부들의 면면을 차례차례 훑었다. 회화루주가 관리하는 주루는 총 세 개. 전부 불법과 합법의 선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것들이었다.

미약하지만 관과도 연이 닿아 있었다. 어찌 탐관오리들이 난세에만 존재하겠는가. 아무리 황제가 법을 엄중히 세우려 해도, 흑도는 흑도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일단 돈을 먹여보고, 난색을 표하면 여인을 같은 방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춘약을 탄 향초를 살살 피워 올리면 열에 아홉은 넘어왔다. 그 순간부터 관리는 빼도 박도 못하는 된다. 장부에 기록이 다 남아 버렸으니, 얌전히 돈을 받아먹고 쉬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회화루주는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 영리하고 비열하게 처신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진짜 여고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건장한 사내 셋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에서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무인임은 분명했다.

“여기까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매 각주.”

“예, 루주님.”

“굳이 집안에서 난장판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맡겨만 주신다면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오겠습니다.”

회화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시오. 수하들도 적당히 끌고 가고.”

“예.”

“그리고 운 각주는 적당히 발이 날랜 놈들 몇 데리고 매 각주를 뒤따라 가게 해. 감당하지 못할 고수다 싶으면 보고하라고.”

“그리 하겠습니다.”

“할 말은 끝났으니 이제 물러들 가라.”

“예, 방주님.”

간부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회화루주는 가만히 앉아 방 안을 둘러봤다.

적당히 헛된 희망이나 심어줄 생각으로 여고수를 운운했건만, 예화 그 멍청한 년이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다.

‘다음에는 그냥 패야겠군.’

회화루주는 혀를 차며 바깥으로 나갔다.

*****

서연이 곧장 회화루로 향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철방부터 들른 것은 무기를 사기 위함이다. 비록 가짜 심검이 있기는 하나, 섣불리 내보일 무기는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검 한 자루만 차고 다녀도 삼류 왈패들이 쉬이 접근치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철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주인이 서연을 맞았다. 구릿빛 근육이 선명한 것이, 마치 오랫동안 외공을 익힌 무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시오?”

“여인이 쓸만한 검 좀 골라주시겠어요?”

“연검, 장검, 단검 중에 어떤 검 말씀이시오?”

“장검으로 부탁드립니다.”

주인은 서연의 몸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치수를 가늠하는 듯했다.

“이쪽으로 오시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쇠망치 소리 우렁찬 곳을 지나니, 몇 자루의 장검이 놓인 탁자에 다다랐다.

“예전에 용봉지회가 열렸을 때 납품하고 남았던 것들이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을 살폈다. 목검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검을 보는 눈은 제법 있었다. 이 정도면 단연 상품(上品)이었다.

“이걸로 할게요.”

서연의 결정에 철방 주인은 잠시 기다리라 청하고는, 숫돌을 돌려 다시금 검날을 갈았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검은 빛을 받아 번들거릴 정도로 영롱하게 빛났다.

철방 주인은 서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직이 물었다.

“이 근방에선 못 보던 분인데, 새로 이사라도 오셨소?”

“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검을 사러 오시는 분들의 눈빛만 봐도 대충 어떤 분들인지 짐작이 가오. 그저 새 무기를 자랑하러 오시는 분도 있고, 별생각 없이 오시는 분들도 있고, 아니면 아예 누군가를 해코지할 생각으로 오시는 분들도 있소. 헌데, 아주 가끔 손님 같은 분들이 찾아오시오.”

철방 주인은 가죽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누구와 싸우시려는지는 모르오나, 무운을 빌겠소.”

“…….”

서연은 잠시 철방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에 발을 걸친 사람이라 그런가, 눈썰미가 남달랐다.

서연은 장검을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처음 잡아보는 검이었으나, 그 궤적이 참으로 유려했다.

‘…….’

크게 분노했던 탓일까. 평소라면 온갖 염려가 몰아쳤을 심상 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할까.

예화에게서 회화루의 수준을 전해들은 서연은 제 승산을 아주 높게 쳤다. 예화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간부는 몇 명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내부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그때서야 서연은 예화 또한 아주 오랜 세월 마음속으로 칼을 갈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그 칼을 다룰 능력이 없어, 맞고 또 맞으면서 견디기만 했던 것이다.

강호가 이렇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결국 직접 나서서 싸워야 한다.

서연은 도로 납검하고는 결심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방 바깥으로 나서자, 화련과 예화가 나란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홑몸이었다면 이대로 예화를 따라가면 그만이었으나, 화련이 문제였다. 데려가자니 위험했고, 그렇다고 이곳에 두고 가자니 야산을 오르다 해코지라도 당할까 염려스러웠다.

일단 적당한 곳에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이웃이 있는 게 좋다는 것이로구나.’

서연은 내심 좁은 주변 관계를 한탄했다. 그런 한숨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화련과 예화는 눈치만 볼 뿐이었다.

서연은 괜히 주변을 훑었다. 객잔에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마땅히 맡길 장소도 없었다. 진지하게 백호에게 부탁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때, 전방에 몇 명의 무인들이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록색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등 뒤에는 ‘맹(盟)’ 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하남 일대의 치안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맹원들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행인들의 행색을 샅샅이 확인했다. 괜한 불안감을 퍼뜨릴 수 있었기에 그저 눈으로 훑어보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흑도를 구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시선에서부터 느껴졌다.

자신들을 향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걸음을 옮기던 맹원들이 일제히 돌아섰다. 서연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에, 제일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미간을 좁힌 채로 서연을 빤히 쳐다봤다.

“……맞는 것 같은데.”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립에 면사, 거기에 여자아이와 동행하시는 분은 흔치 않지.”

들으라고 저러는 걸까.

곧 처음에 입을 열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물었다.

“혹, 서연 님 되십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염이선이라 합니다. 장산 조장님께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는 사정이 있어 직접 뵙진 못했지만,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인사드립니다.”

서연도 얼떨결에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듣자하니 그때는 밥 심부름을 나가 서연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 어디로 향하시는 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일이 바쁘진 않으신가요?”

“지금은 순찰 시간이라 괜찮습니다.”

사실, 혹여 서연을 만나게 되면 하던 일도 전부 내려놓고 나서서 도우라는 엄포를 들었기 때문이었으나, 그 이야기는 쏙 빼놓았다. 무림맹원들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서연은 다시금 무림맹원들의 심성에 감탄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제자를 잠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 하심은?”

서연은 비룡각에서 예화를 만나게 된 것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리하여 회화루로 갈 생각인데, 제자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습니다.”

“그, 혹 회화루에 혈교나 마교라도 있습니까?”

“예?”

“……헛소리였습니다. 무시하셔도 됩니다.”

염이선은 난처한 얼굴로 화련을 응시했다.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마를 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엄청 무서운 분이시라 들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또 아닌 것 같아 염이선은 혼란스러웠다. 초면부터 기세를 뿜어내셨다면 납작 엎드려 알겠습니다만 반복했을 터. 허나 지금은 진정 제자를 맡기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일을 해결하지 못해 직접 나서게 되었다고 문책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험상 이런 경우는 동행하는 것보다 뒤를 밟는 쪽이 현명했다. 본래 흑도란 위기 탐지 능력만큼은 기가 막혀서, 상대가 저보다 많거나 조금이라도 강한 것 같으면 도망치려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노강호께서도 그걸 아시고 혼자 나서시려는 것이리라.

‘일단 조장님께 보고는 드려야겠다.’

잠시 서연의 눈치를 살피던 염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자분은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연은 그렇게 말한 다음, 무릎을 숙여 화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다녀오마.”

염이선과 맹원들은 홀연히 사라지는 서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서연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가서 보고부터 드리고 오는 것이 좋겠다. 옷도 눈에 안 띄는 걸로 갈아입고.”

경공으로 달려가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노강호의 제자야 업고 가면 될 테고 말이다.

저들끼리 상의하는 맹원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화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화련이라고 해요.”

“나는 염이선이라 한단다. 내가 업어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염이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화련은 껑충 뛰어서 순식간에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어린 소녀가 보일 만한 경공은 아니었으나, 그 눈빛에는 경멸이 잔뜩 담겨 있었다.

“어…….”

“싫어요.”

화련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염이선을 노려보다가, 이 장(丈)이 넘는 거리를 좁혀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염이선은 입을 다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문득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앙칼진 막내 누이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한참 말 안 들을 나이라는 것이다.

‘왜 맡기고 가신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