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3
7.
“메리.”
“란, 셀?”
란셀은 털썩 주저앉은 메리골드의 눈가를 손수건으로 훔쳐주었다.
“란셀한테 주려고 했던 샌드위치가 전부……란셀?!”
망설임 없이 떨어진 샌드위치 하나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모래 알갱이가 으득으득 씹혔지만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맛있네. 메리가 만든 샌드위치. 평생 이거 하나만 먹고도 살 수 있겠어.”
“란셀……!”
란셀은 가끔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고는 한다. 만약 자신이 그날 제도로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메리골드는 평생을 란셀 없이, 란셀은 평생을 메리골드 없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았을까, 라고.
이 세상에 녀석이 소실되었던 순간들을 생각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까짓 흙 좀 묻은 샌드위치를 먹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무슨 과일이야, 메리.”
“……산딸기……인데……머, 먹을 거야? 안 돼, 란셀, 더러워, 지지야!”
“다 땅에서 온 거야. 먹어도 돼.”
“안 돼,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란세엘!”
메리골드가 란셀을 말려왔지만 듣지 않았다. 냅다 바구니로 담았다.
‘이 아까운 걸 왜 버려.’
그래.
엉망이었지만 못 먹을 것도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먹어주마. 메리골드가 없던 시절 그토록 눈에 아른거리던 것이 아니던가.
“땅에 떨어진 걸 먹으면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주섬주섬 들어서 바구니에 주워 담았다. 잘 털어서 먹으면 된다는 란셀의 중얼거림에 메리골드는 당황이 깃든 표정이었다.
“메리.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같이 만들자고.”
란셀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빵을 굽는 것부터 시작해서. 햄을 자르고, 야채를 뜯고, 치즈를 올리는 것까지 전부 다.”
시끌벅적한 용병들의 목소리, 어수선한 여관의 분위기, 겁먹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란셀은 오직 메리골드만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란셀은…….”
“빵집, 만들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도와줄게.”
메리골드의 딸꾹질이 점점 멎었다.
“메리의 꿈. 내가 이루게 해줄게. 이 마을의 빵집은 맛있다는 말을 듣는 그날까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란셀에게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메리. 자꾸 도망 다니면 이제 용서 못 해. 나도 마음 아프다고.”
차가운 밤공기가 란셀이 두르고 있던 로브를 휘날렸다.
마력 고갈로 서서히 밝아오는 메리골드의 모습처럼, 란셀의 모습에서도 경건한 아우라가 흘러나왔다.
“기사님…….”
마을 여자아이들 몇몇이 입을 가리며 눈빛을 떨기 시작했다.
부랑자 출신의 소년이 기사라니, 얼토당토않은 표현이었지만 지금 란셀을 바라보는 그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했다.
‘기사’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메리골드 앞에 앉은 열한 살의 란셀. 그의 모습이 흡사 교단 앞에 무릎 꿇은 성당기사처럼 경건하게만 보였으니까.
“나는……내가 란셀한테 방해될까 봐……알고 지낸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여덟 살의 소녀 메리.
열한 살의 기사 란셀.
그래.
이곳에서의 메리골드는 주군도 친구도 오래 알던 사이도 아니었다. 어쩌면 생판 남에 더 가까웠다.
“메리의 샌드위치가 내 마음에 들었거든. 그거면 부족할까?”
“…….”
메리골드는 란셀의 옷자락을 꽉 붙잡으며 얼굴을 묻어왔다. 점점 떨림이 가라앉고 안도감을 되찾았다.
란셀은 가만히 녀석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참고로 청혼도 진심이야.”
“으으으……!”
메리골드의 귓불이 단숨에 달아오르는 걸 보며, 란셀은 흘러내린 녀석의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음?”
그때였다.
“뭐야?”
용병들의 시선이 란셀을 향했다. 정확하게는 그의 허리춤에 있는 물건에.
“꼬맹이. 설마 그거 칼이냐.”
아까부터 칼자루를 단단하게 움켜잡고 있던 란셀이었지만 서슴없이 그것을 뽑아 드는 짓은 하지 않았다.
란셀은 이미 메리골드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았다.
분노에 사로잡혀서 섣불리 피를 보는 짓 따윈 원하지 않을 녀석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속 시원하게 목을 베어버리던 란셀은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메리골드와 지내면서, 메리골드 기사단의 녀석들과 부대껴 살아오면서, 란셀은 자기도 모르게 많은 부분에서 변화해온 것일지도 몰랐다.
“쥐새끼만 한 놈이 겁도 없이 칼을 다 들고 다니고. 끄윽! 어이, 그거 한 번 이리 가져와 봐라. 네가 가지고 다니기에 위험한 물건이라 그러는 거다.”
“이 자식, 순 강도가 따로 없구먼.”
“술값 벌어다 줄 테니까 잠자코 있어! 어이, 애송아. 칼 이리…….”
“한 번이라도.”
“응?”
란셀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얼굴만 돌렸다.
용병은 문득 마주한 란셀의 은빛 눈동자가 어쩐지 서늘하다고 느꼈지만, 한껏 달아오른 술기운은 그런 사소한 것 따윈 깔끔하게 무시하도록 만들었다.
“딱 한 번이라도 제 몸에 닿을 수 있다면 드리죠.”
짤그랑, 청아한 소리를 내며 반짝이는 물체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금화!”
“어디서 저런걸!”
“뭐 이런, 부자 꼬맹이를 봤나.”
용병들은 단숨에 술이 깨는 걸 느꼈다.
반사적으로 주워 들려던 그들의 눈앞에서 날카로운 것이 가로질렀다.
“윽!”
“이크!”
흠칫 뒤로 물러나자, 어느덧 칼을 뽑아 든 란셀이 보였다.
갈라진 흔적이 곧은 직선을 그리며 금화와 용병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고작 열한 살 어린애한테서, 떨어진 금화조차 못 빼앗아 갈 실력들이 용병이라 떠들고 다닌 건 아닐 테고……그렇지요?”
물론 란셀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엔 이제부터 저 인간들한테 시달릴 수많은 영민들이 너무 신경 쓰였다.
아니, 핑계였다. 사실 그냥 발길질에 차여서 날아간 메리골드의 노력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자, 어서. 저를 때려눕히고 제 칼과 돈을 가져가십시오.”
“생각보다 더 겁대가리 없는 꼬맹이였구나. 어차피 간수도 못 할 큰돈, 우리가 받아 가주마.”
용병들 품에서 칼이 뽑히자 분위기가 일순에 바뀌었다.
“란셀!”
“꺄아악!”
란셀은 칼날에 있는 흠집만 보아도 이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알았다.
고작 전쟁 몇 번 경험한 걸로 잔뜩 치기가 올라온 용병들이다. 꼴을 보아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
열한 살의 몸이 장성한 어른 여럿을 상대하기란 어려운 법.
하지만 상대 쪽에서 그를 평범한 애송이로 보고 있다면 말이 좀 달라졌다.
“란셀, 안 돼!”
“괜찮아, 메리.”
옷깃을 붙잡는 메리골드를 진정시키며 칼을 뽑아 들었다.
‘……흠…….’
란셀도 지금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의 칼은 단테 가문에서도 애지중지하는 보검 중 하나였다.
지금쯤 단테 자작께서 얼마나 열이 올라가 있을지 느껴지는군. 당분간은 절대 돌아가지 말자. 란셀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 네 잘못이다. 원망하지 말거라.”
용병의 손에서 칼날이 쇄도했다.
어깻죽지를 향해 곧장 날아드는 칼날, 구경하던 이들의 눈이 질끈 감겼다. 꼼짝없이 란셀이 피를 뿌리며 쓰러질 거라 생각했다.
“아아악!”
뜻밖에 비명은 용병 쪽에서 터져 나왔다.
팔목을 움켜잡고 비틀비틀 물러나고 있었다. 힘줄이 끊어졌으니 두 번 다시 저 손으로 칼을 쥘 일은 없을 거다.
“뭐 하는 거냐, 이 자식아. 어린애한테 쪽팔리게!”
“끄으윽, 피……피가……!”
란셀이 한 것이라곤 칼을 들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것뿐이었다.
보는 이들에겐 용병이 스스로 다가와서 칼에 베인 것처럼만 보일 거다.
기사의 검술을 한 번도 정면에서 겪어보지 못한 자들이라면 그렇게 느낄 만도 했다.
“비켜!”
다음 용병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애석하게도 이들은 고작 열한 살 꼬마를 상대하는데 여럿이 덤벼드는 건 낯부끄러운 일이란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란셀은 단숨에 칼날을 걷어 올렸다. 날아간 무기를 멍하게 바라보던 그의 무릎으로 망설임 없이 칼날을 그었다.
“끼아아악!”
고성을 지르며 무릎을 움켜잡는 남자. 안 됐지만 그는 남은 인생을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가게 될 거다.
“에이, 한심한 놈들.”
이내 메리골드의 바구니를 걷어찬 놈이 걸어 나왔다.
놈의 덩치는 용병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편에 속했다.
하물며 꼬나쥔 물건은 1.6미터에 이르는 대검이었다. 그냥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란셀을 두 동강 내버릴 만한 흉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란셀의 행운이 끝날 거라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그의 이름을 울부짖는 메리골드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 죽여도 정당방위다. 꼬맹이야!”
부우웅, 공기를 찢어버리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커다란 굉음에도 란셀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겁먹어서 꼼짝하지 못하는 거다. 칼날이 란셀의 지척에 도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용병은 그렇게 thought했다.
“……!”
찰나의 순간.
그는 란셀의 눈과 마주쳤다.
용병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온몸의 솜털이 단숨에 끼쳐 올라오는 감각이다.
열한 살 꼬맹이의 눈동자.
그것이 또렷하게 자기 몸을 훑고 있다.
본 적 있었다. 몇 번 안 되는 전장에서 용병은 저런 눈빛을 하고 있던 인간을 딱 한 번 본 적 있었다.
기사.
살인에 도가 튼 인간들. 기사도니 뭐니 잘 모르겠고 아무튼 살인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인간들.
조용하게 칼날을 갈무리하고 있던 란셀의 모습은, 흡사 그런 이들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으으!”
앞서 당한 두 명이 방심해서라거나, 운이 너무 없어서가 아님을 알아차린 그였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란셀의 칼날이 번개처럼 솟아 올라왔다. 무언가 허전해지는 감각을 느낀 용병의 두 눈알이 휙 까무러쳤다.
“끅!”
깔끔하게 잘려 나간 손목 하나가 빙글빙글 포물선을 가르다가 철퍼덕 떨어져 내렸다.
이내 고요가 찾아왔다. 신음하는 용병 세 명 외에, 그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는 사람이 없었다.
란셀은 아무 말 없이 칼날에 묻은 피를 헝겊으로 훔쳤다.
“지혈대 가져오세요. 그냥 두면 죽을 겁니다.”
차분한 란셀의 목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용병들은 이제 칼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거다.
전장을 돌아다녔다면 필히 죽었을 테니 어찌 보면 자비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적어도 란셀은 그렇게 생각했다.
8.
용병들이 부리고 간 행패는 이틀이 지났을 때 겨우 일단락되었다.
용병 세 명을 차례대로 처리해버린 것에 대해 란셀은 ‘그냥 운이 좋았지 뭡니까?’ 라는 말로 대충 넘길 뿐이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을 경비로 란셀을 세우자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아, 저는 메리랑 빵집을 만들 거라서.”
물론 그때마다 란셀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빵집.
메리골드와의 빵집.
“란셀.”
창고를 찾아온 메리골드의 밝은 얼굴, 란셀은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메리. 이리와.”
“으히히!”
팔을 벌리자 품으로 쏙 들어왔다.
‘정상화 됐구나, 메리.’
안 어울리게 도망다니기나 하고 말이야. 란셀은 메리골드의 등을 토닥거리며 이제야 되찾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슬슬 같이 빵집 만들기, 해볼까, 메리.”
“응! 근데 란셀, 손님이 찾아왔대.”
“손님?”
메리골드가 살짝 비켜난 자리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깥에서부터 쏟아지는 햇빛을 가린 그 모습에 란셀은 식은땀을 흘렸다.
“란셀이랑 아는 사이라길래 여기까지 데려왔어. 어때. 잘했지?”
무구한 메리골드의 목소리. 그래, 녀석에겐 죄가 없었다. 죄가 있다면 란셀 쪽이었다.
“똑바로 서라, 란셀.”
“……어떻게 알고…….”
“감히 내 귀중한 보검을 가지고 가출하다니. 과연 배짱 하나만큼은 가문의 피를 타고났구나, 란셀.”
흑곰 모피로 만든 망토의 남자. 단테 자작.
그가 란셀을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오는 됐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