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5
25.
후일담.
이것도 일종의 후일담이라면 후일담인 걸까? 황실에 들어오기까지 란셀과 메리골드 사이엔 많은 일이 있었다.
그냥 시골에서 알게 된 영애님과 기사님이 황실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기까지의 과정치고는 죽을 위기가 너무 많기는 했잖아?
‘결과적으로 잘 풀렸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란셀이 황실에 입성한 뒤부터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무사태평한 시간은 원래 빠르게 흘러가는 법인지.
3년.
그 사이에 있었던 좋은 소식 세 가지.
일단 첫 번째.
란셀의 더딘 성장이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란셀 님, 또 크셨어요.”
“휴우.”
이제까지 웅크리고 살아가던 란셀의 성장판은 그가 열여섯 살이 되는 해부터 미친 듯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젠장, 믿고 있었다고!’
가뜩이나 화살에 맞아 이대로 영영 난쟁이 기사님이 될 뻔했을 자기 미래를 생각하자면, 자다가도 한숨이 푹푹 나올 지경이었는데,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로 다행이었다.
‘어릴 땐 몰라도, 크고 나면 난쟁이인 게 좀 고달프니까 말이지.’
란셀이 학문을 닦거나, 마법을 익히거나, 하다못해 영지에 틀어박혀 농사나 관리하는 입장이었다면 키 좀 작다고 아쉬워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란셀은 기사, 그것도 모든 기사들의 귀감이라 불리는 황실 기사였다.
기사에게 있어서 신장은 결코 좌시하지 못할 사항이었다. 칼을 휘두르는데 짧은 몸만큼 커다란 애로사항이 또 없었으니까.
그래. 길게 뻗은 팔다리가 필요할 뿐이다. 절대 외모 때문이 아니야. 진짜라니까?
“이러다가 또래 중에서 제일 커지시는 거 아니에요?”
“뭐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란셀은 쑥쑥 자라는 키에 한시름을 내려놓았다.
‘기사 가문 유전자 최고.’
좋은 소식 두 번째.
메리골드의 학문적인 성취였다.
“훌륭합니다, 전하! 이제 합격이 머지않으셨군요.”
“후후, 이 정도쯤이야.”
이러다가 영영 외출을 못 하는 게 아닌가 싶던 메리골드의 학문적 성취는, 란셀이 황실에 머물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치 총기가 깃드는 듯했다. 예법, 학문, 교양, 사교 등등 모든 영역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녀석이 지닌 주인공 보정을 생각하자면 이거도 꽤 늦은 재능의 발현이었지만, 이제까지 그녀의 시무룩한 공부 태도를 지켜보고 있던 궁정 귀족들은 쾌재를 부르기 바빴다.
“전하!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시는군요! 감격스럽습니다!”
“헤헤헤!”
좋아 보이네.
“란셀, 어서 칭찬 시작해줘!”
“훌륭합니다, 전하. 최고, 최고.”
“으흐흐흐!”
“최고, 진짜로 최고.”
“기분 좋아!”
“전하께선 아직 외출하지 못하시는 분 중에 최고시네요.”
“야호! 응?”
뭐 아무튼 잘된 일이었다.
이번 회차에서 란셀이 정한 목표는, 메리골드와 행복한 삶을 살아보는 것이었으니까.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 발목이 잡혀서야 곤란했다.
생각해보면 녀석에게는 별로 대단한 게 필요하지 않았다.
부랑자로 떠돌 때에도, 두 눈이 멀었을 때에도, 길바닥에 버려졌을 때에도, 도둑질로 연명하던 그때에도, 메리골드의 행복엔 언제나 그렇듯 대단한 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란셀 경, 볼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전하를 부탁드립니다.”
“예, 안나 시녀장.”
시녀장이 빠져나가자, 드넓은 황실의 공부방엔 란셀과 메리골드만 남았다. 잠깐의 침묵. 발소리가 멀어지는 걸 듣던 메리골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메리골드가 란셀을 잡아끌었다.
“란셀! 이쪽으로! 급하다, 급해!”
“…….”
못이기는 척 옆자리에 앉았다.
메리골드가 찰떡처럼 옆에 찰싹 달라붙은 거도 그와 동시였다.
“휴우, 진정된다.”
애착 인형 같은 건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기에 란셀은 그러려니 했다.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에, 길게 자란 메리골드의 머리칼이 날아와서 얼굴을 간지럽혔다.
“전하, 잠시.”
손으로 귀밑머리를 넘겨주자 살짝 붉어진 녀석의 귓불이 보였다.
“으흠.”
메리골드는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외출하면 가장 먼저 어디에 갈까. 란셀.”
“저야 전하가 원하는 곳으로 따라가야겠죠?”
“그러면 나는 란셀이 원하는 곳으로 갈게!”
“평행선이네요.”
“어째서?”
“이럴 때는 한쪽이 이끌어줘야 하는 겁니다.”
“그럼 란셀이 이끌어주면 되겠네! 나는 그게 더 좋으니까!”
“메리 전하는 전하이신데 몸종인 제 의견에 따르셔도 되는 겁니까? 아직 군주학을 덜 배우셨네요.”
“싫어, 몸종이라니! 란셀은 내 기사님이잖아. 하나밖에 없는 내 기사님!”
뾰로통한 반응.
잘 익은 과일 크기의 머리가 란셀 어깨에 톡 얹어졌다.
“그러니까. 알겠지? 란셀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갈게.”
“재미없어도 뭐라고 하지 마세요.”
“란셀이랑 있으면 다 재밌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
“…….”
“…….”
“…….”
“데이트…….”
“……?”
메리골드는 꽉 감싸 안은 란셀의 팔을 살짝살짝 꼬집어왔다.
“청혼……연인……결혼……딸 다섯, 아들 일곱…….”
“…….”
입 밖으로 생각하는 바가 다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바람은 대부분 성취되지 못할 거다.
결혼을 하는 것까지는 어찌어찌 가능하더라도 아직은 넘어야 할 신분의 벽이 높았고, 자식을 낳기에는 란셀에게 불임이란 어마어마한 장벽이 존재했다.
불임.
지난 삶에서 메리골드와 관계를 가진 적은 많았으나 단 한 번도 아이를 가진 적은 없었으니까. 과거 란셀을 향해 고자냐고 뾰족하게 따져오던 영애들의 말은 절반 정도 옳았던 거다.
‘불임 치료가 이 세계에서 가능한가?’
모르긴 몰라도 이 불임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으리라. 어쩌면 란셀이 무한한 회귀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그게 더 힘들지도 몰랐다.
란셀은 옆에 붙은 메리골드의 머리를 쓱쓱 쓸어 넘겨주며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10분이 넘게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이대로 회귀가 끝나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어떤 의미로 이번 삶은 그와 메리골드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회차였다.
사소한 시행착오가 있었을 뿐, 메리골드 가문은 몰락을 피했고, 녀석은 황녀가 되어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약속받았다.
앞으로 이 제국에서 펼쳐질 일들만 잘 넘긴다면 두 사람의 삶은 꽤 괜찮은 결말을 맞이할 거다. 불임……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거지.
좀 아쉬운 거지.
“란셀.”
“……?”
메리골드가 눈을 감고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우움.”
‘아니, 그건 아니지, 메리.’
란셀은 녀석의 입술을 뒤로 밀쳐내려고 했다. 고작 열세 살인 녀석이었다. 아무리 소꿉놀이 같은 거라고 해도 이건 란셀 안에 있는 가치관을 반하는 것이었다.
란셀이 뒤로 물러나려던 그때, 공부방의 문이 열렸다.
“힉!”
후다닥 떨어진 두 사람.
메리골드는 뜨거워진 얼굴로 “에흠! 케흠!” 헛기침을 연신 터트렸다. 종이로 부채질하는 녀석의 목덜미에 진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전하…….”
안나 시녀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아,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 그렇지, 란셀?”
“사실입니까, 란셀 경?”
뭐라고 해야 하지.
솔직하게 말할까.
“……전하께서 저를 만지셨습니다.”
“…….”
그날 메리골드는 벌로써 반나절 동안 란셀과 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잔뜩 심술이 올라온 표정의 메리골드가 란셀의 팔을 계속해서 꼬집어왔다.
“안나한테 그걸 이르다니…….”
“따가워요, 전하.”
“흥.”
.
.
.
좋은 소식 세 번째.
메리골드는 열세 살의 여름, 8월이 찾아온 그날 마침내 모든 시험에서 통과했다. 길고도 짧았던 황실 생활을 끝내고 외출의 자유를 부여받았다.
물론 이동할 때마다 호위와 하인들이 우르르 따라붙어야 했지만.
“메리골드 전하와 란셀 단테……!”
“두 사람이 황실에서 그렇게 붙어 지내신다더니……!”
“저분들이 그 유명하신 Lan과 Mari……!”
제도의 어디를 가도 따라다니는 눈이 너무 많아서, 뭐 하나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기는 했지만.
“메리골드 전하! 제가 대신 골라드릴게요!”
“야! 라라! 전하한테 예의 없게 뭐해!”
“시끄러워! 나도 메리골드 님의 시녀가 될 사람인데 뭐 어때!”
단테 가문의 형과 누이들까지 따라다니며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기는 했지만.
“란셀.”
메리골드는 언제나 즐거워 보였다.
“토끼를 키우는 곳이 있대요, 전하. 식용이긴 한데 엄청 귀엽대요!”
“가자! 라라! 내일 바로 가자!”
“같이 가요!”
“토끼 고기도 먹고 오자!”
“그, 그래요!”
제도의 거리, 정원, 호수, 번화가, 어디에서도 메리골드에겐 행복한 나날이 이어졌다.
지금 이 순간 엔딩을 맞이한다면 틀림없이 행복한 결말이 찾아오리라 생각될 정도로.
* * *
8월의 하순.
메리골드와 란셀은 단둘이서 도망치듯 제도를 돌아다녔다.
평민인 것처럼 허름한 옷으로 꾸민 채, 따라오던 하인들을 모두 뿌리치고 암행에 나선 것이다.
“란!”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제도 외곽의 여관.
메리골드는 상태가 좀 이상해져 있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벅차오르는 흥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하하하!”
-귀한 집 따님 같은데, 이거 한 잔 마셔보겠나!
-좋아요!
-메……마리 님, 그거 술이에요.
-한 모금만 해볼게!
란셀은 녀석이 극도로 술에 약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한 모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라고 안일하게 눈감아줘 버린 것이 실수였다.
“음악 좋다아아!”
“으하하! 귀한 집 따님이 놀 줄 아는구먼!”
시뻘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메리골드가 악기 연주에 맞춰서 덩실덩실 평생 본 적도 없던 춤을 추고 있었다.
숫제 막춤에 가까웠다. 시녀장 안나가 저 꼴을 보았다면 그대로 기절했을지도 몰랐다.
“란, 어서!”
“하아.”
술 취한 용병과 주민들이 춤추는 그곳에 란셀은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다.
“아하하!”
메리골드의 손을 붙잡은 란셀은 그녀의 마구잡이식 발동작에 겨우 보조를 맞추었다.
지난 수년 동안 배운 사교댄스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그냥 달라붙어서 휘적휘적 몸을 흔드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란셀, 너무 좋아!”
결국 술기운이 더 올라온 메리골드는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커어어…….”
“…….”
결국 란셀은 메리골드를 둘러업고 황실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으음.”
30분쯤 걷자 녀석이 꼼지락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여관에서 자고 싶었는데…….”
“더 늦으면 시녀장님이 걱정할 겁니다.”
“란셀은 아직 레이디의 마음을 모르는구나.”
“……?”
“하아. 얼른 어른이 됐으면…….”
“…….”
열세 살 꼬맹이 주제에.
란셀은 헛웃음을 흘렸다.
어느덧 제도의 하늘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오늘도 종탑 위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겠지.
“란셀.”
“네, 전하.”
“……나는 란셀한테 필요한 사람이야?”
술기운 때문일까. 노을 진 하늘 아래에서 란셀의 목을 꽉 끌어안은 메리골드가 던진 목소리엔 뼈가 있었다.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등에 업힌 메리골드의 표정을. 지금 메리골드가 하는 걱정이 무엇인지를.
“란셀한테 나는……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야?”
수백 년을 살다 보면 뻔뻔해질 만도 했지만, 어째서일까. 란셀은 그 말에 대답하기를 조금 주저했다. 대수로운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좀 낯간지러웠다.
“메리.”
그렇기에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내일은 어디에 놀러 갈까?”
“……헤헤…….”
친구를 대하듯 흘러나온 란셀의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메리골드는 그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웃었다.
“란셀, 헤헤헤!”
“간지러워요.”
“란셀, 좋아.”
“…….”
근심을 모두 벗어던진 미소.
그녀의 솔직함은 란셀에게 있어서 어쩌면 배울 점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어디 가고 싶으신데요.”
“란셀이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또 그겁니까.”
“흐흐흐.”
.
.
.
그리고 메리골드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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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타임 0년 1일]
—계승의 방 입장 완료.
—계승을 완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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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메리골드는 번쩍 두 눈을 떴다. 수많은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기억.
란셀 단테와의 수많은 만남, 수많은 추억, 수많은 기억, 그리고 가슴을 꽉 채우다 못해 지금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무수한 감정들.
지금의 삶에서 쌓아 올린 시간까지도.
“란셀 님이 내 기사……내 아랫사람…….”
과거를 각성한 황녀 메리골드의 입가로 점점 웃음이 퍼져나갔다.
“란셀……내 몸종…….”
웃음이 점점 더 짙어졌다.
“으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