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7
10.
“황제 폐하를 위하여! 위대한 대제국 프리지아를 위하여!”
“정렬하라! 인원을 점검할 것이니 그만 돌아다니고 모이라! 말은 왼쪽으로, 사람은 오른쪽으로!”
이번 전쟁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 란셀은 사전 소집에서 이미 알았다.
다음 주가 되면 제국 남부의 전장으로 떠날 이들임에도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번쩍번쩍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성 밖 공터에 모여든 모습.
란셀은 근처에 있던 기사 한 명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이번에 가는 곳이 어디랍니까?”
“웬 꼬맹이……라고 생각했더니 란셀 군이로군.”
“…….”
“크하하! 사과할 테니까 표정 풀어, 최연소 황실기사 란셀 경. 앞으로 큰일 할 사람이 겨우 이거 가지고 입술이 튀어나오면 안 된다고.”
기사는 팡팡팡 란셀의 등을 두드리며 머리까지 쓰다듬어왔다.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이랑 달리 완전하게 어린애 취급이었다.
“듣기로는 제국 남부에 있는 베린 평야 지역이라던가?”
“제법 멀군요. 말을 타고 가더라도 편도로 일주일 거리인데…….”
“호오, 어떻게 그런 것도 아는가?”
“…….”
“너무 걱정은 말게, 란셀 군. 향수병 걸릴 새도 없이 한 달 안에는 끝날 테니까. 거기 활동하는 도적 잔당들만 쓱싹 정리하면 끝이라고. 대제국 기사들이 하기엔 너무 쉬운 일이지.”
“아.”
기억났다.
제국 남부의 세력.
페리아 공국 잔당들이다.
확실히.
숫자는 많아도 정규군을 상대로 하기엔 오합지졸들 뿐인지라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쉽게 끝나겠네.’
란셀은 마음을 놓았다. 아직 덜 자란 몸으로 격한 전장을 뛰어다니다간 성장판에 무리가 갈 것이 아닌가.
……그나저나.
‘메리한테는 뭐라고 하지?’
잠깐의 고민.
언제나 이런 고민의 정답은 하나였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 * *
—————————
-8월 1일.
-두꺼운 망토를 벗어두고 싶어지는 계절입니다. 앞으로 네 번의 밤이 지나면 저는 전장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도 제 글은 계속 전해질 테니까 너무 심려하지는 마세요. 너무 외롭게 만들 일은 없을 겁니다. 8월의 광장엔 투베로사 꽃이 피었습니다. 여름이 무르익은 게 느껴지는군요. 돌아올 때 꽃다발을 안고 찾아뵙겠습니다.
-란.
—————————
“안나 시녀장님! 시녀장님!”
“저, 전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들이 전쟁으로 간다는 거, 진짜예요?”
“전쟁이라니 갑자기 무슨 말씀을……?”
“전쟁! 이거! 여기 신문에 나와 있는 저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쓴 이 편지……가 아니라 글귀! 이거 말이에요!”
“……일단, 준비되는 대로 제가 기사단장을 만나 여쭤보겠습니다, 메리골드 전하. 그 전에 우선 아침 식사부터 같이 드시…….”
“빨리 일어나서 물어보러 가요, 어서!”
“전하, 어머!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전하!”
한바탕 소란 이후.
“전하, 조만간 전쟁이 있을 예정이냐고 물어보셨다는데……?”
궁정기사단장이 메리골드를 찾아왔다. 조마조마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왔다.
“황실에서 남부에 지원군을 보낼 예정이기는 합니다만. 딱히 전투라고 부를 만한 일도 없을 겁니다. 기사들에겐 전공을 거둘 좋은 기회이지요. 전하께서 이런 쪽에 관심을 두실 줄은 미처 몰랐군요.”
메리골드는 차분한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한시름을 내려놓았다.
“란셀, 용서 못 해!”
여전히 자기 허락도 없이 떠나버린 란셀을 향해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긴 했지만.
—————————
-8월 3일.
-미워요. 제가 걱정할 걸 알면서도 그런 위험한 여정을 떠나신다니, 저에게 8월은 항상 기다림의 시기인 건가요? 옛날 생각에 또 한숨도 못 이루었어요. 다치고 돌아오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을 보내주세요. 늦으면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돌아올 땐 지나는 길마다 꺾어둔 꽃으로 꽃다발을 만들어서 가져오세요. 꽃 하나마다 있었던 그간의 이야기를 제게도 꼭 들려주세요. 주군의 명령이에요. 절대 용서 못 해요.
-메리.
—————————
“기사가 전장으로 떠나는 걸 슬퍼하는 여인……근데 명령이라?”
“아! 그럼 이건 주군과 기사의 관계였던 건가!”
“글귀 속 두 사람은 연인이자 주종관계임이 분명하오. 이룰 수 없는 사랑인 거지.”
“신분의 벽이 막아서는 관계……!”
“이룰 수 없다는 건 누가 정한 것이오. 주군과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왜 그렇게 흥분하시오?”
“젠장, 다음 글은 언제 오는 거야!”
“기다리시게나. 내가 이빌 남작을 찾아가서 멱살을 잡고 물어볼 테니까!”
.
.
.
‘거리가 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보내라는 건 무슨 소리냐, 메리.’
란셀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국 남부로 향하는 여정에 오른 란셀 주변엔 두 명의 파발이 따라붙었다.
단테 영지에 있을 때부터 그와 가까이 지내던 경비병들이었다.
둘의 목적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짐을 대신 들어주며 수발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보내면 제도까지 어느 정도 걸리지?”
“아직 출발한 지 얼마 안 됐으니 반나절이면 도착할 겁니다.”
“부탁할게.”
“예!”
파발이 신문에 올릴 편지를 들고 사라졌다. 놈은 메리골드가 쓴 편지를 가지고 며칠 뒤에 돌아올 거다.
과거 상단을 운영하던 메리골드와 연락하면서 익힌 방법이었다.
—————————
-8월 5일.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기사가 전쟁에 나가는 건 꽤 당연한 일이랍니다? 제도의 높은 종탑에 올라 남쪽을 보시면 제가 보일 겁니다. 지평선 말고는 안 보인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그 안 어딘가에는 제가 있는 겁니다.
사실, 가던 길을 멈추고 제도 방향을 돌아본 제 눈에도 그랬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곤 공허한 지평선뿐이었습니다. 더 멀리 떠날 때마다 더 희미한 지평선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곳에 있는 겁니다.
쓰다 보니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해가 질 때 서로 눈을 마주쳐보는 건 어떨까요? 틀림없이 서로가 무사함을 느낄 겁니다. 매일 연락하는 건 어렵겠지만 이렇게라도 대화를 대신하면 어떨까요. 오늘도 좋은 하루였습니까? 저는 사실 꽤 즐거웠습니다.
-란.
—————————
“란셀 도련님!”
며칠 뒤, 파발이 도착했다.
메리골드가 보낸 8월 6일 자의 편지를 들고.
란셀은 스튜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간밤의 야영지에서 편지, 신문의 사본을 펼쳐보았다.
—————————
-8월 6일.
-어제 종탑에 올라서 지평선을 보고 왔어요. 거짓말쟁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럴싸한 말로 속이려고 하다니 어림도 없어요.
그래도……솔직히……정말 좋았어요. 길고 높다란 회랑의 계단을 오르는 길이 꼭 당신을 다시 만나는 길처럼 느껴져서 설레었어요. 탁 트인 꼭대기로 도착했을 때 환한 빛이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날 뻔했어요. 해가 지는 걸 보다 보니 더 보고 싶어져서 눈물이 났어요. 오늘도 종탑을 올라갈게요.
-메리.
—————————
란셀은 몰랐던 일이지만.
그가 보낸 편지로 인해 제도에 있는 다섯 개의 종탑은 그날 이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부디 제 아들이 무사하기를.”
“저의 부군,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그만 돌아가시죠, 아가씨.”
“조금만 더 있을게요. 제 오라버니 생각이 가실 때까지만.”
전장으로 떠난 이들의 연인, 가족은 물론. 고향이든 사람이든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저마다 종탑 꼭대기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매일 오후 저물녘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제도의 종탑은 이제 멀리 떨어진 이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장소가 되었다. 란셀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버린 새로운 문화였다.
메리골드도 그 안에 한 명이었다. 호위기사와 시녀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녀는 황궁의 종탑을 올랐다. 그곳에서 저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전하. 슬슬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응. 내일 또 와요, 시녀장.”
“얼마든지 따르겠습니다, 전하.”
* * *
같은 시각.
제도 부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란셀의 귀에는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했다.
“적이다! 모두 쓸어버려라! 전공도 전리품도 모두 네놈들 몫이다!”
수백 기의 기병들이 밀밭을 가로질렀다. 도적들과 칼을 부딪치며 비명과 괴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죽여라!”
“끄아아아악!”
“사, 살려줘! 제발……아아악!”
피가 튀어 오르는 들판, 란셀은 석양으로 물든 그곳에서 가만히 말을 멈춰 세운 채 북쪽을 바라보았다.
“란셀! 뭐하냐!”
“란셀 군! 뒤에!”
다가오는 무언가가 느껴졌을 때 칼을 뽑아 들었다.
—————————
-8월 11일.
-혹시 제가 전공을 거두어서 돌아간다면 뭘 해주실 겁니까? (중략) 잘못되면 벌만 주시려고 하고 섭섭합니다. 상을 좀 내려주시지요.
-란.
—————————
* * *
—————————
-8월 12일.
-머리를 쓰다듬어 드릴게요. 그거면 충분하죠? 부족하다면 뽀뽀를 해드릴게요. 이 이상의 것이 없을 거예요. 아니, 있긴 하지만 아직은 없는 거예요. (후략)
-메리.
—————————
* * *
—————————
-8월 19일.
-보통 주군이 그 기사에게 내리는 포상으로 뽀뽀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돈이나 하인이나 말 같은 게 일반적이지요.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일까요? (후략)
-란.
—————————
* * *
—————————
-8월 20일.
-뜸해진 연락 때문에 안 그래도 서운한데 자꾸 불평하면 벌을 더 추가할 거예요. 저는 지금 슬프다구요. 마음이 허하다구요. 문학이고 뭐고 다 버려두고 그쪽으로 달려가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다구요.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예요? 돌아오시면 그냥 제 방에 묶어두어야 할까요? (후략)
-메리.
—————————
* * *
—————————
-8월 30일.
-무섭네요. 또 방 안에 들어가서 안 나오시는 건 아니겠죠? (후략)
-란.
—————————
* * *
—————————
-8월 31일.
-다시 들어가면 또 데리러 와 주실 건가요? (후략)
-메리.
—————————
“혹시 이건 수필이 아닐까?”
“무슨 소린가?”
“마침 최근에 제국에서 기사들을 남부로 보내지 않았나. 이 산문의 기사도 마침 그 시기에 전쟁에 나섰고.”
“……듣고 보니 그렇구먼.”
“요즘 들어 종탑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그렇고. 이건 틀림없이 수필이야. 진짜로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 거라고!”
그 시점부터 살롱 귀족들은 ‘연작 산문’에서부터 무언가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그럴 리가.”
“시기를 반영해서 쓰는 것이겠지, 이 사람아. 어떤 기사가 전쟁통에 이런 걸 신문에 실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실로 대단한 인간이긴 하지.”
어디까지나 소수의 의견일 뿐, 그들의 말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메리골드와 란셀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자들은 황실에서도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거나, 이빌 쉔 남작을 비롯한 측근 몇몇뿐이었기에 아직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남부로 파견된 황실지원군의 소식이 끊어진 날을 기점으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패전이오! 패전!”
제도 곳곳으로 급보가 뿌려졌다.
머지않아 그 소식은 ‘패전’이라는 이름에서 ‘후퇴 후 재정비’라는 말로 뒤바뀌었지만.
제도 귀족 중에서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순진한 자는 없었다.
“황실지원군이 당했구나!”
11.
“어떻게 된 거래?”
“못 들었나? 공국 잔당이랑 손을 잡은 반란군 일당들 때문이라잖아. 그놈들이 제국군을 기습했다더군. 그 일대에 도적질하던 놈들이 한둘은 아니지 않나.”
“그런 일이…….”
“만만하게 봤다가 된통 당한 거지. 지금쯤 뿔뿔이 흩어져서 귀환 중이라고 하던데…….”
“다음 지원군을 보내는 건 빨라도 몇 달 뒤…….”
“패전인가?”
“어허, 후퇴라고 말하라니까.”
“후퇴라는 이름의 패전…….”
얼마 뒤, 하나둘 돌아오는 기사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예상 밖으로 전투가 제법 격렬했다는 걸 알게 하는 대목이었다.
신문을 통해 전해지던 ‘기사’의 소식은 그 날을 기점으로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