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란셀은 이미 그의 진짜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이 황궁에서 황제를 사칭하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과거.

그와 아주 깊은 인연으로 엮일 뻔했던 사람.

물론 그것까지 입 밖에 내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해도, ‘가짜 황제’의 모든 것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대담한 건지, 그냥 멍청한 건지.”

황제는 베일 너머에서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제후국 왕족들조차 나를 만나기 위해 무엇이든 내놓으려 할 것이다. 내 심장일지라도. 그런데 더 내놓으라고 하니.”

“말뿐인 자들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심장은커녕 그 주변의 것도 꺼내지 않을 자들입니다.”

“…….”

대신 혀를 차며 혀를 차는 황제였다.

“그래. 확실히 너는 궁정 기사로 적합하지 않군. 선물을 바꿔주겠다.”

“폐하……!”

기사들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주군에게 말대꾸한 자가 원하는 것을 받아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시끄럽다.”

황제의 마음은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만약 이 선물마저 거부한다면 그때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란셀 단테.”

“물론입니다. 폐하.”

란셀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궁정 기사직을 물리고 다시 주는 선물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닐 것이 분명했다.

“아이스포드.”

“예, 폐하.”

궁정백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내 기억으로는 그대 집안에 곧 성인식을 치를 여식이 있다고 들었다.”

“예. 제 삶의 축복과도 같은 아이입니다, 폐하.”

“슬슬 혼담이 오고 갈 때도 되었겠군.”

“……그렇, 습니다만…….”

궁정백의 얼굴에 점차 불안감이 드리웠다.

“제국 3대 미녀라고 들었네. 얼굴은 아버지를 닮지 않아서 다행이야.”

“자주 듣습니다, 폐하. 헌데 그 이야기는 갑자기 어떠한 연유로…….”

“그 나이대에 괜찮은 남자가 별로 없어서 곤란하겠어.”

“괘, 괜찮습니다, 폐하. 제 딸이, 아직 결혼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보기 안타까워서 하는 말인데 무슨 섭섭한 소리인가.”

식은땀. 란셀은 궁정백의 얼굴에 맺히는 식은땀을 보았다.

“아이스포드 궁정백은 나의 오랜 벗이자 가족이니, 내가 직접 좋은 사람과 이어주고 싶구나.”

“어떤…….”

“어떤 사람이냐고?”

황제의 고개가 획, 궁정백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향했다.

“황제가 주는 선물조차 마음에 안 든다고 발로 차버릴 만큼 배포가 큰 남자일세.”

란셀은 자신을 찌르는 시선을 느꼈다.

“폐, 폐하, 우선, 제가 딸에게 의중을 한번 물어본 후에 결정…….”

“아니. 길게 끌 것 없이 당장 나흘 뒤에 약혼식을 열게. 선물로는 황실의 조각상 하나를 보내주도록 하지.”

음.

뭐지?

“걱정하지 마라. 무엇인지는 몰라도 나는 대단한 놈이라는 것은 확실하니.”

3분? 아니, 2분? 너무나도 짧은 순간에 혼담이 결정되었다.

“마스터.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나요?”

메리골드가 속삭이며 물었다.

“나랑 저 아저씨 딸이랑 결혼시킨대?”

“네?”

메리골드의 표정이 굳었다.

“거, 거절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황제가 시키는데 거절을 어떻게 두 번이나 하겠냐.”

“그, 그렇지만, 그건 그렇지만, 마스터는…….”

“까라면 까야지, 뭐. 이번에도 투덜댔다가는 진짜 내 머리가 바닥에 떨어질걸.”

사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혼약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흔한 일이었다.

중세 시대가 아닌가.

더구나 궁정백은 시종장으로 활약할 만큼 전통적인 친황파 귀족이었다.

그와 혼맥이 닿는 순간, 란셀 또한 친황파, 혹은 황실파 정도로 분류되는 귀족 단체의 일원이 되는 셈이었다.

정확히는 단테 가문 그 자체가 말이다.

‘흠, 오히려 잘된 건가.’

황실과의 인연은 그에게도 좋은 일이었고, 단테 가문 입장에서도 경사나 다름없었다.

제도로 도망간 아들이 무려 시종장 딸을 낚아온 것이다. 변방의 지방 귀족 가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신분 상승이나 다름없었다.

‘메리골드와 내가 결혼할 일도 이제 없어져 버렸네.’

그렇게 본다면 잘된 일이었다.

잘된 일.

흠.

그래.

그런 거겠지.

“결혼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게…….”

“이제 좀 마음에 드나, 란셀 단테.”

메리골드의 가느다란 목소리는 곧이어 들린 황제에 의해 묻혀 사라졌다.

“덕분에 제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방방 뛰시겠군요, 폐하.”

“그래야지. 너는 만인의 구애를 받던 제국 3대 미녀, 아이스포드 영애를 하루아침에 얻은 거다. 당연히 좋아해야지.”

황제는 반론을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궁정백의 사위가 된 것을 축하한다. 란셀 단테. 식은 황실에서 내가 직접 주관하겠다.”

15.

알현을 마친 이후.

란셀은 메리골드를 데리고 한참 동안 비밀 정원을 돌아다녔지만, 황자와 마주치는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메리골드의 상태가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멍하니 의식이 멀리 날아간 채 란셀의 뒤꽁무니만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

옆에는 시종장, 그러니까 이제 란셀의 장인이 될 아이스포드 궁정백조차 마찬가지였다.

“마스터가 결혼…….”

“내 딸이…… 이런 놈한테…….”

이런 상황에서 황자를 만났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만 터졌을 게 분명했다.

“저도 슬슬 돌아가겠습니다. 그, 흠. 장인어른? 이라고 해야 하나요?”

“…….”

해가 질 때까지 비밀 정원을 돌아다니다 황궁을 빠져나왔을 때, 저 멀리 제도의 거리 시장이 보였다.

“구경이나 좀 하다가 갈까.”

입구에서 마차를 세웠다.

란셀은 시장 한복판까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메리골드는 한 발짝 뒤에서 조용히 그를 따라왔다.

좌판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호객 행위,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 뛰어다니는 아이들.

한참 동안 걷던 란셀은 문득 한 장소에서 멈췄다.

“동쪽 대륙에서 온 신비한 보석이오! 은화 한 닢만 주시오! 들고만 있어도 인생이 활짝 편다고 하는 보석이오!”

말이 보석이지 그냥 색깔이 특이한 돌멩이를 늘어놓은 노점상이었다.

란셀은 그 안에서 파란색 돌을 줄줄 꿰어 만든 목걸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보는 눈이 있구려! 그거야말로 행운과 복을 부른다고 하는 돌이오.”

더 시끄럽게 굴기 전에 란셀은 은화를 던져주어 그의 입을 막았다.

“메리.”

뒤따르던 메리골드에게 다가갔다.

“이리 와봐.”

란셀은 목걸이를 직접 그녀에게 걸어주었다. 물결치며 흔들리는 눈동자가 보였다.

처음 보았던 날의 그것처럼 여전히 영롱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였다.

“마스터.”

“왜.”

낮게 잠긴 목소리.

“서로 좋아하지 않아도 결혼하는 사람이……원래 많은 걸까요.”

“왜 그런 걸 신경 쓰는 거냐.”

가늘게 떨리는 메리골드의 입술을 보며, 란셀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인연이라는 게 꼭 필연적일 필요는 없잖아. 하루아침에 맺어지는 사이도 있는 거지. 나도 원한 건 아니지만.”

메리골드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삶에는 딱히 필연이라는 것이 없었다. 매번 아주 사소한 계기로, 아주 다양한 결말이 발생하는 캐릭터였다.

이번만 해도 그랬다. 그녀는 단지 검을 배웠기에 용병이 되었다. 이걸 과연 필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글을 배웠다면 학자가 되었을 수도, 노래를 배웠다면 음유시인이 되었을 수도, 요리를 배웠다면 식당을 열었을 수도 있었다.

이게 정말 필연일까?

황비가 되는 것이 게임 내 목표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답일지조차 아직 모른다.

운이 좋으면 이 지긋지긋한 회귀가 멈출 테고, 운이 나쁘면 10년이라는 영겁을 계속 떠돌며 끝없이 미쳐갈 것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럼 적어도 제가 옆에 있게 해주세요, 마스터.”

란셀은 허리를 감싸는 메리골드의 팔을 느꼈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녀의 몸이 찰싹 달라붙자, 란셀은 어쩌지도 못하고 가만히 굳었다.

“계속 옆에서 붙어 사는 것 정도는 허락해주세요.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내가 주워 먹을 콩고물이 꽤 떨어지는 인간이긴 하지.”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메리골드의 목소리가 물기를 머금고 떨렸지만, 란셀은 그럴수록 더 떳떳하게 웃었다.

“그냥 하녀로라도 써주세요, 마스터. 옆에서 따라다니기만 할게요.”

“메리처럼 단련된 사람을 하녀로 쓰는 건 아깝지. 인재 낭비야.”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단단하게 눌러붙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란셀은 내심 안도감을 느꼈다.

‘이 상태로 뒀다간 또 나랑 결혼했겠는데?’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자기 망상이 아니었다. 내심 너무 오버인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확실했다.

‘용병으로도 이미 한참이나 같이 지냈으니까.’

란셀은 그날 저녁이 다 가도록 달라붙어 있는 메리골드를 떼어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결혼식 당일이 찾아왔다.

* * *

“으흐흑, 내가 이런 별 볼 일 없는 남자랑……용병 길드나 운영하는 한심한 귀족이랑……으아아앙!”

“…….”

란셀은 통곡하는 젊은 귀족 여자을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 인생은 망했어요. 망했어, 완전히 망한 거야, 으흐흐흑! 이제 겨우 성인이 됐는데! 사랑하지도 않는 저 가난한 집안 귀족이 내 약혼자라니……흐윽, 신이시여, 어찌 제게 이런!”

결혼식을 불과 두 시간여 앞둔 상황이었다.

아이리 위즈 아이스포드. 제국 3대 미녀 중 하나라 불리던 여자.

그러니까 란셀의 약혼녀가, 지금 온 세상을 비관하고 있었다.

“……감히 마스터를…….”

“그만. 그거 아니야, 메리.”

란셀은 바로 옆에서 으르렁거리는 메리골드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심지어 장식용 칼자루에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마스터, 저는 당신이 복에 겨운 줄도 모르는 사람을 가장 경멸하는 편이에요.”

“진정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렇게 싸늘한 표정의 메리골드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이시여!!!”

“……죽일까요, 마스터.”

“참아.”